홍차(紅茶)는 찻잎 내부의 성분이 자체에 들어있는 효소에 산화되어 붉은빛을 띠는 차를 뜻합니다. 녹차나 보이차와 같이 효소의 작용을 중지시키는 쇄청(햇볕에 쬐어 말림)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잎 자체의 효소로 산화되었기 때문에 백차, 녹차, 우롱차 보다 더 많이 산화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홍차는 전 세계 차 생산량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으며 소비율도 높습니다. 동양에서는 찻물의 빛깔 때문에 홍차(紅茶)라고 부르지만, 서양에서는 찻잎의 검은 색깔 때문에 'black tea'라고 부릅니다. 서양에서 red tea는 허브의 일종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루이보스 차를 말합니다. '홍차' 하면 떠오르는 나라가 있습니다. 바로, 영국인데요. 영국에 얽힌 홍차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홍차 이야기
차는 오래전부터 무역에 사용되었습니다. 몽골 티베트와 시베리아에서는 19세기까지도 찻잎을 앞축 한 덩어리가 화폐로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는 '보이차'로 분류되는 차에 대한 기술이지만, 서양 사람들은 여기서 이야기하는 차(茶)가 자신들이 마시는 홍차와 같은 차로 믿고 있으며, 그들이 저술하는 문헌에서도 차를 화폐로 사용했다는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서양사회에 알려진 차(茶)는 홍차(紅茶) 뿐이었으며, 지금도 홍차는 서양에서 팔리는 차의 90%를 넘게 차지하고 있습니다.
홍차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전해옵니다. 차(茶)를 배로 운송하다가 더운 날씨에 차가 산화되었는데 마셔보니 의외로 맛이 있어서 일부러 이 방법으로 만들어 마시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합니다.
400년 전 청나라의 군대가 푸젠 성의 어느 산골마을에 들이닥쳤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군사들을 피해 곳곳에 꽁꽁 숨어버렸습니다. 하필 군사들은 찻잎이 쌓여있는 창고에 머물며 먹고 자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사라졌는데, 병사들이 머무는 동안 찻잎은 차로 만들 시기를 놓쳐 모두 상해버렸습니다. 주민들은 힘들게 거둔 찻잎을 버릴 수가 없어 주변에 있는 소나무 가지를 태워 찻잎을 말려 차로 만들었습니다. 그러자 이 차가 유럽상인들에게 몇 배의 가격으로 팔리게 되며 '홍차'라는 상품으로 이름 붙여졌다고 전해집니다.
17세기 영국과 홍차
흔히 영국이 홍차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에 관해 전해오는 이야기도 많은데요. 17세기에 영국에서는 홍차로 인해 성갈등이 생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17세기 당시 유럽에서는 신문물이었던 커피가 여자와 아이들에게 해롭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에 남성들만 즐길 수 있는 음료였고, 영국 위주로 남성만을 위한 '커피 하우스'라는 카페 문화가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상인과 선원들이 즐겨 찾던 로이드 커피 하우스는 거의 100년에 가까이 영국의 남성만을 위한 활력장소였습니다. 반면 커피하우스에서 커피를 마실 수 없었던 여성들은 집에서 버터밀크 같은 음료를 마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포르투갈 왕녀 캐서린이 영국의 찰스 2세와 결혼하면서 홍차를 들고 왔는데요. 갑자기 영국왕실과 귀족들 사이에 홍차를 마시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고,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커피와 커피 하우스에 반감을 가졌던 여성들이 홍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그 수요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커피는 여성들에게 해롭다는 말이 있었던 데다, 굳이 커피 하우스에 가지 않아도 거실 테이블에서 아름다운 중국산 도자기 찻잔 세트에다 즐기며 교양을 뽐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홍차는 상류층 여성의 생활에 없어선 안될 필수품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에 "남성은 커피, 여성은 홍차"라는 대립구조가 생겼으며 영국에서 자국 이성 혐오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몇몇 상류층과 귀족 남성들은 자기가 소유한 중국산 도자기를 과시하고자 사람들을 불러 홍차를 즐기게 되었고, 이것이 귀족사회에서 유행처럼 번지자, 오히려 커피 하우스는 선원들이나 가는 칙칙한 장소라는 이미지가 생겨났습니다. 이에 남녀노소 홍차 소비가 급격하게 늘어나며 플레져 가든(Pleasure garden)이라는 티파티 장소가 마련되기도 했는데요. 이런 과정을 거쳐 홍차가 평민들에게도 확산되며 홍차와 티파티는 영국의 대표적인 대중문화가 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과 홍차
18세기에는 영국의 홍차 수입으로 인해 차의 가격이 급등하고 재정이 줄어들자, 당시 식민지인 미국에 비싼 값에 강제로 팔아먹으려다 결국 미국인들의 저항으로 보스턴 차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는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합니다.
이때가 마침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조에서도 동인도 회사를 세우고 식민지 경영에 나서고 있을 때였는데. 미국 독립전쟁이 발발하여 영국, 13개 식민지, 프랑스, 네덜란드가 편 가르고 싸우기 시작하자 국제 항로는 마비됩니다. 그 때문에 청나라의 개항장인 광저우는 텅 비고 찻값은 천정부지로 폭등하는데 오스트리아 동인도 회사는 대박을 노리고 무역선을 광저우에 파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이 휴전이 성립되고, 각국의 수십 척의 무역선들이 광저우로 향하자 대박을 노렸던 오스트리아 동인도 회사는 본전도 못 건지게 되었다.
더구나 은을 실은 배가 아일랜드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일어나고 대금 지불도 못하는 상황이 되자 회사는 파산합니다. 그리고 돈을 못 받은 청나라는 신성로마제국 깃발을 건 배는 입항을 거부하는 조치를 내리는 상황까지 발생하게 됩니다.
19세기 영국과 홍차
19세기에는 차 소비량이 최고조로 급증하여 당시 차의 주요 수출국이었던 청나라와의 무역으로 인해 영국의 무역적자가 심각해졌습니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하여 영국은 대량의 아편을 반강제로 청나라에 팔아넘기게 되었고, 결국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아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결국 영국이 승리하여 난징조약을 맺는 동시에 청나나에 막대한 배상금을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청나라 왕조를 무너뜨리는데 크게 일조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런데 영국은 인도산 홍차도 충분히 맛있는데 왜 굳이 중국산 홍차를 고집하다가 적자가 났는가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19세기까지 인도는 홍차를 수출하는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은 차의 재배법이나 제다 기술을 비밀로 했고, 유럽인들도 차나무는 중국의 토양에서만 제대로 자라는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823년에 탐험가 로버트 부르소 소령이 인도의 아삼 지방에서 새로운 차나무 품종을 발견했고, 1848년 영국의 식물학자 로버트 포춘이 중국 상인으로 변장하여 중국의 차 제조법을 알아내고 중국의 기문종 홍차 묘목과 종자를 유출시켰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이후 영국은 인도에서 본격적인 홍차 재배를 시작했으며, 19세기말부터 인도는 본격적인 홍차 플랜테이션이 되었습니다.
이상의 글에서도 볼 수 있듯 영국에서는 홍차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습니다. 차나무의 원산지는 중국이며, 현재는 인도가 세계 홍차 생산의 약 44%, 소비의 72%를 점유하며 최대 생산국이며 소비국으로 꼽히고 있다고 하지만 영국이 홍차 문화의 꽃을 피운 건 맞습니다. 아마도 인도의 인구가 많기 때문일 겁니다. 1인당 홍차 소비량은 영국이 인도보다 훨씬 많다는 조사결과를 흔히 볼 수 있듯 홍차의 대명사가 영국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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